서울을 통해서 본 한국사의 이해
1. 서울의 山과 江
내사산(內四山)-四神(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
백악산(白岳山, 342m) - 일명 北岳山. 조선시대에 삼각산신과 백악산신을 모심.
목멱산(木覓山, 265m) - 일명 南山. 태조 이래 꼭대기 동쪽의 국사당(國祀堂, 國師堂)에서 남산신인 목멱대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냄. 그래서 일제는 이곳에 1925년 조선신궁을 세움. 조선신궁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태양 여신]와 메이지[明治]천황을 신으로 모심. 기존의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이전. 이름도 무학을 위한 개인 사당으로 격하시킴.
[그림] 남산 국사당터,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일제는 남산 북쪽 기슭과 그 앞 공간(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정치(조선총독부1926?경성부청사1926)-경제(조선은행1912)-사상(조선신궁)의 수탈 트로이카 체제를 완성함.
경성역(서울역)1925은 그 유입구이자 배출구 역할을 함.
뿐만 아니라 소비(미스코시1930?조지아 백화점1921), cf) 종로 화신백화점1931~
통신(경성우편국1905), 호텔(철도호텔1914)까지도 마련함.
인왕산(仁王山, 338m) - 일명 西山 또는 필운산(弼雲山). 고려시대에 인왕사라는 절이 있었음 에서 명칭 유래. 불필요한 논쟁 仁旺山인가 仁王山인가?
낙타산(駱駝山, 125m)-산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긴 데서 명칭 유래했다고 알려짐. 그러나 관음의 주처인 ‘보타낙사산(普陀洛迦山)’의 준말인 듯. 한양 동쪽의 지세가 약해서 동대문을 ‘興仁之門’으로 작명하고, 옹성(甕城)을 쌓음.
※ 내사산을 포함한 도성 밖 10리 이내의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나무를 베거나 무덤을 쓰는 것을 금지함. 이를 ‘사산금표(四山禁標)’라 함.
외사산(外四山)
북한산(北漢山, 836m) - 일명 삼각산(三角山, 백운대?인수봉?만경봉),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중악(中岳). 조선 숙종 37년(1711)에 북한산성 축조. 38년에 완성.
숙종 44년(1718)에 탕춘대성(蕩春臺城, 일명 西城, 4km)으로 도성과 연결.
관악산(冠岳山, 629m) - 풍수지리상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인 火山.
때문에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걸고, 숭례문 앞에 인공 연못(南池)을 팜. 속설에 광화문 앞에 해치상을 둔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 라고 함.
무학대사가 말하기를 “관악산을 정남에 두고 궁궐을 지으면 불산인 관악산에 눌려 5世가 되지 못해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는 어땠나?
연주대(戀主臺) - 고려 말 강득룡신덕왕후 강씨의 오빠과 세종의 형 양녕과 효령대군의 사연 깃든 곳.
덕양산(德陽山, 125m) - 행주산성 소재.
용마산(龍馬山, 348m) - 일명 아차산(峨嵯山, 阿且山). 백제 개로왕455~475이 고구려군에 압송되어 죽은 곳. 신라 아차산성과 고구려 보루군이 소재함.
內[明堂]水-청계천(淸溪川), ‘西出東流’
한강의 제2지류. 13.7km. 경복궁 서북쪽 백운동 부근에서 발원. 성수동에서 제1지류인 중랑천과 합류. 원래 이름은 ‘청개천(淸開川)’, 일제가 1916년 즈음 ‘청풍계천(淸風溪川)’의 줄임말로 사용.
※ ‘똥물’의 어원이 만들어진 곳
18세기 중엽 청계천이 배수로의 기능을 상실. 이로 인해 물난리 빈번. 영조가 대대적인 준천사업을 함.
※ 청계천은 왜 막혔을까?
청계천 복개사업 1937년부터 1977년까지. 게다가 고가도로까지. 다시 뜯어내고(2년 만에)...
※ 웬 복개(覆蓋)? 행정착오의 슬픈 현실이....
※ 일제는 왜 개천 복개사업을 했을까?
外[明堂]水-한강(漢江). 천혜의 방어선이자 교통로, ‘東出西流’
※ 내명당수와 외명당수는 풍수지리에서 반대가 되어야 사대문 안의 홍수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함.
한반도의 젖줄, 한강(漢江, 514km)
길이로는 압록강, 낙동강, 두만강에 이어 4위. 유역의 면적으로는 2위.
북한강의 발원지(금강산) / 남한강의 발원지(태백시 금대산 검룡소) 두물머리[兩首里]에서 하나로.
고대에는 아리수(阿利水), 한산하(漢山河)로 불림.
※ 삼국시대 한강을 장악하는 자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했다! 왜? 1. 2.
조선시대에는 한강이 지나는 구역에 따라 나누어 부름(소양강, 여강, 한강, 용산강, 서강)
특히 서울을 끼고 도는 부분을 경강(京江,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이라고 부름.
그 안에 한강, 용산강, 서강이 포함되어 三江이라고 부름.
고대로부터 방어와 물길[水運, 漕運]의 역할. 거기에 더해 대중국교통로까지.
전국의 조세곡, 강원도의 목재, 특산품 수취에 유리(이것이 조선왕조의 서울로 정해진 결정적 계기).
조선전기에는 서해의 조류가 한강 깊숙이 한강진(한남대교)까지 올라왔으나, 조선후기에는 용산까지만 올라옴(일반 민가에 온돌이 보급되면서 땔감의 수요 증가. 토사의 퇴적 때문).
※ 관련 지명 - 북창동?남창동(선혜청 창고), 광흥창(녹봉 창고)
주요 나루
관진(官津) -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
사진(私津) - 광나루, 동작진
※ 한강 최초의 다리는? … 배다리[舟橋] [그림] 배다리
※ 지금 남아 있는 최고의 다리는 … 살꽂이다리(뚝기纛旗와 살꽂이, 그리고 함흥차사)
※ 1900년 한강철교 준공. 1916년 한강대교(인도교) 1917년 준공(제1한강교).
나루에 다리가... 광나루(광진교), 송파나루(잠실대교), 뚝섬나루(성수대교), 한강진(한남대교), 서빙고나루(반포대교), 동작나루(동작대교), 노량진(한강대교), 마포나루(마포대교), 양화진(양화대교)
※ 잠실(蠶室)도 섬이었다!
조선시대의 얼음 창고
관영빙고 - 궁궐에 두 개. 동빙고(국가 제사용), 서빙고(궁궐과 2품 이상의 관원에게 제공)
민영빙고 - 한강변에 30여 개
기타 주요 하천
* 중랑천(中浪川, 中梁, 中良) - 한강의 제1지류. 36.5km.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 일제시대에 ‘중량’에서 ‘중랑’으로 변경된 듯.
* 홍제천(弘濟川) - 제1지류. 14km. 모래내[沙川]으로도 부름. 도성 밖 4대원의 하나인 홍제원(弘濟院)에서 유래. 인조 曰 “홍제원의 냇물에서 목욕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 ‘환향녀(還鄕女)’ ‘호로(胡虜)자식’ ‘胡주머니’의 유래
* 탄천(炭川) - 제1지류. 35km. 용인시 구성면 수청동에서 발원. 숯내. 곧잘 물이 넘쳐 주민들이 한탄했다하여 탄천(嘆川)이라 불렀다고도 함.
2. 풍수와 유교사상의 조화, 都城
우리나라의 경우 남향이나 동향이어야 햇빛을 잘 받을 수 있으므로 집과 마을, 도시 무덤까지도 북쪽으로 주산(主山)을 기대고 앉아 남쪽으로 안산(案山)을 바라보는 형국.
風水 - 중국 고대부터 시작된 땅에 대한 인식체계로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
내4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것이 조선시대 서울 도성(18.2km). 도성 안이 조선시대의 서울.
성벽은 공간적 경계선의 기능[본질]과 방어벽의 기능[부차]
그러나 본질적으로 정도전의 유교적 이상도시론의 구현. ??주례周禮??의 예제를 따름.
유교의 오상(五常 : 仁?義?禮?智?信)에 충실함.
4대문(四大門) - ①흥인지문(興仁之門)?②돈의문(敦義門)?③숭례문(崇禮門)?④숙정문(肅靖[淸]門)[탕춘대성의 홍지문(弘智門)으로 보완]
※ 숭례문의 현판은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이 씀(현재의 숭례문은 세종 29년1447에 중건한 것)
※ 종루[普信閣] - 밤 10시 인정(人定, 28宿)과 새벽 4시 파루(罷漏, 33天). 원래 단층 누각.
※ 만들어진(1929) 전통, ‘제야(除夜)의 종’ 타종식. ‘대동아공영권’을 꿈꾼 일제의 의도.
4소문(四小門) - ①혜화문(惠化門 : 홍화문弘化門)?②소의문(昭義門 : 소덕문昭德門)?③광희문(光熙門 : 수구水口?시구문屍口門)?④창의문(彰義門 : 자하문 紫霞門)
조선의 5궁궐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 경운궁[덕수궁]
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배치원칙 - ‘좌묘우사(左廟右社)’
임금을 기준으로 ...사단 +직단
② 관청[육조(六曹)]과 시장[시전(市廛)]의 배치원칙 - ‘전조후시(前朝後市)’
이 병 호 예 형 공
운종가(雲從街 : 지금의 종로) - 도성 경제의 중심지. 시전(市廛)과 육의전(六矣廛;비단?모시?무명?삼베?종이?어물).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국가에 납품하는 물품 조달. 세금과 정치자금 조달. 그 대가로 특정 품목에 대한 전매권[금난전권(禁亂廛權)] 확보. 조선시대판 정경유착
다만 조선후기 사상(私商)의 성장과 함께 동대문 이현(梨峴)과 남대문 칠패(七牌) 시장이 활성화.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의 활약
북촌(北村)과 남촌(南村) - 청계천을 중심으로 나눔.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양반 관료가 거주.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남산 북쪽 기슭 일대. 가난한 선비, 하급관리, 서민이 거주.
정치적 당색으로도 북촌에는 노론이, 남촌에는 소론?남인?북인이 살았음.
※ 인사동이 골동품 거리가 된 까닭은?
사대문 용그림 | 내사산 | 외사산 | 지류 | 기타천 | 사소문 봉황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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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흥인지문 | 용마산 | 중랑천 | 혜화문(惠化門 : 홍화문弘化門) | ||
낙타산 한양 동쪽의 지세가 약해서 동대문을 ‘興仁之門’으로 작명하고, 옹성(甕城)을 쌓음. |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함 | 살꽂이다리(뚝기纛旗와 살꽂이, 그리고 함흥차사) | 동대문과 북대문의 사이에 있으며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 | ||
서대문 돈의문 | 인왕산 | 덕양산 | 홍제천 | 소의문(昭義門 : 소덕문昭德門)? | |
고려시대에 인왕사라는 절 | 행주산성 소재. | ‘환향녀(還鄕女)’ ‘호로(胡虜)자식’ ‘胡주머니’의 유래 |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있음 | ||
남대문 숭례문 | 남산 | 관악산 | 內[明堂]水-청계천(淸溪川), ‘西出東流’ | 만초천 | 광희문(光熙門 : 수구水口?시구문屍口門)? |
남산 북쪽 기슭과 그 앞 공간(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정치(조선총독부1926?경성부청사1926)-경제(조선은행1912)-사상(조선신궁)의 수탈 트로이카 체제를 완성함. 경성역(서울역)1925은 그 유입구이자 배출구 역할을 함. 뿐만 아니라 소비(미스코시1930?조지아 백화점1921), cf) 종로 화신백화점1931~ 통신(경성우편국1905), 호텔(철도호텔1914)까지도 마련함. | 풍수지리상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인 火山. 연주대(戀主臺) - 고려 말 강득룡신덕왕후 강씨의 오빠과 세종의 형 양녕과 효령대군의 사연 깃든 곳. | 18세기 중엽 청계천이 배수로의 기능 | 인왕산물줄기 | 시체를 내가는문 | |
북대문 숙정문 탕춘대성의 홍지문(弘智門) | 백악산 | 북한산 | 탄천 |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 紫霞門) | |
일명 北岳山. 조선시대에 삼각산신과 백악산신을 모심. | 일명 삼각산(三角山, 백운대?인수봉?만경봉),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중악(中岳). 조선 숙종 37년(1711)에 북한산성 축조. 숙종 44년(1718)에 탕춘대성(蕩春臺城, 일명 西城, 4km)으로 도성과 연결. | 제1지류. 35km. 용인시 구성면 수청동에서 발원. 숯내. 곧잘 물이 넘쳐 주민들이 한탄했다하여 탄천(嘆川)이라 불렀다고도 함. | 북대문하고 서대문 사이에 위치 인조반정 관련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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